신약성경의 가장 이른 사본들은 대문자로 쓰였고, 낱말 사이에 띄어쓰기가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문장 부호는 아주 적었고 따옴표는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언어의 모든 현대 성경에 있는 쉼표, 마침표, 물음표, 따옴표는 편집자들과 번역자들이 넣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아무런 어려움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한 문장이 어디서 끝나고 다음 문장이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문법이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따금 쉼표 하나가 구절의 뜻을 결정합니다. Open Word Bible은 이런 선택을 *문장 부호*라는 분류의 의미 결정으로 기록하고, 어려운 것은 불확실로 표시합니다. 대개는 자신이 번역하는 판본인 SBL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문장 부호를 따르지만, 편집자들의 쉼표도 하나의 판단이므로, 번역이 그것을 다르게 읽을 때에는 기록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9:5: 쉼표인가, 마침표인가?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속한 것들을 열거합니다. 양자 됨, 영광, 언약들, 율법, 예배, 약속들, 족장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시아 자신입니다. 그다음에 이 말이 나옵니다.
ὁ χριστὸς τὸ κατὰ σάρκα, ὁ ὢν ἐπὶ πάντων, θεὸς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낱말 하나하나로 옮기면 “육신으로는 그 그리스도, 만물 위에 계신 분, 영원히 찬양받으실 하나님, 아멘”입니다. 문장 부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가 하나님이라고 불리는지가 달라집니다.
- “육신” 뒤에 쉼표를 두면, 나머지는 메시아를 묘사합니다. “메시아,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다.”
- “육신” 뒤에 마침표를 두면, 나머지는 하나님을 따로 찬양하는 말이 됩니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찬양받으시기를.”
SBL 판본에는 쉼표가 있고, 번역도 그렇습니다.
나는 내 형제자매, 곧 혈통으로 내 동족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까지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녀로 삼으셨고, 그들에게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족장들도 그들의 조상이며, 그리스도께서도 혈통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아멘.
기록은 세 가지 이유를 듭니다. “계신 분”이라는 말은 가장 자연스럽게는 방금 이름이 나온 인물을 가리킵니다.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은 독자가 메시아의 인간 혈통 너머에 있는 그분의 모습을 기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별도의 문장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는 보통 “찬양받으실”이 맨 앞에 오는데(“찬양받으실 하나님, 곧 아버지”, 고린도후서 1:3), 여기서는 로마서 1:25에서처럼 그 말이 방금 이름이 나온 분 뒤에 옵니다.
기록은 반대쪽 견해도 정직하게 밝힙니다. 바울은 다른 어디에서도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몇몇 사본과 많은 독자는 “육신” 뒤에 마침표를 둡니다. 그래서 이 결정은 *불확실*로 표시되어 있고, 각주가 대안들을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 1:3: 문장은 어디서 끝나는가?
때로는 Open Word Bible이 자신이 따르는 그리스어 판본과 다르게 문장 부호를 읽습니다. 요한복음 1:3은 ὃ γέγονεν, 곧 “생겨난 것”이라는 두 낱말로 끝납니다. 이 말은 3절을 마무리할 수도 있고 4절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 “생겨난 것 가운데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다.”
SBL 판본은 둘째 것을 싣고 있으며, 초기 그리스도인 저술가 여럿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번역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따르는 첫째 것을 택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생겨난 것 가운데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기록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분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다”는 말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기록은 이 결정을 불확실로 표시하고, SBL 판본이 다르게 문장 부호를 찍는다고 분명히 말하며, 그 읽기를 각주로 알려 줍니다.
누가복음 23:43: “오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 가운데 하나가, 예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Ἀμήν σοι λέγω σήμερον μετ’ ἐμοῦ ἔσῃ ἐν τῷ παραδείσῳ
낱말 하나하나로 옮기면 “진실로 너에게 내가 말한다 오늘 나와 함께 너는 있을 것이다 그 낙원에”입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두 부분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앞에 쉼표를 두면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가 됩니다. 그 뒤에 쉼표를 두면 “진실로 오늘 너에게 말한다.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가 되며, 어떤 번역들은 그렇게 싣고 있습니다.
Open Word Bible은 “오늘”을 약속 쪽에 둡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바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기록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이 그 첫머리에 “오늘”을 덧붙이는 일이 한 번도 없다는 점, 그리고 누가가 지금 찾아오는 구원에 대해 “오늘”을 자주 쓴다는 점을 짚습니다. “오늘 구주가 나셨다”(2:11), “이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4:21),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19:9)가 그렇습니다. 이 결정은 불확실로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각주가 다른 문장 부호를 알려 줍니다.
고린도전서: 이것은 누구의 말인가?
따옴표도 문장 부호이며, 바울의 편지들은 따옴표에 관해 특별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가 자기에게 써 보낸 편지에 답하는데(7:1), 때때로 그들의 구호를 되받아 인용한 다음 그것에 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어에는 인용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표시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분명한 예는 6:12입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는 말이 이 구절에 두 번, 10:23에 다시 두 번 나오고, 그때마다 바울의 “그러나”가 뒤따릅니다. 이 말을 아무런 한계 없는 바울 자신의 원칙으로 받아들이면, 그가 방금 9절과 10절에서 한 말과 모순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은 이 말을 고린도에서 쓰이던 표어로 표시하고, 번역은 그것을 따옴표 안에 넣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 예는 더 어렵습니다. 7:1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고린도 사람들의 편지에서 나온 말일 수 있고, 2절부터 5절까지가 그것을 반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다고도 말하므로(7–8절), 그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번역은 이 말을 인용으로 표시하고, 결정을 불확실로 표시하며, 다른 견해를 각주로 알려 줍니다.
요한복음 3장: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서 끝나는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 말씀하십니다. 어느 지점에서 그 말이 예수님의 말씀이기를 그치고 요한 자신의 해설이 되는 것일 수 있는데, 사본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용을 15절에서 끝냅니다. 16절부터는 동사가 과거로 바뀌고(“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그분이 주셨다”), 니고데모는 다시 말을 듣는 사람으로 나오지 않으며, 몇몇 표현은 요한이 다른 곳에서 자기 목소리로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학자들은 인용을 21절 끝까지 이어 갑니다. 16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해 예수께서 방금 하신 말씀과 이어지고, 주제들도 끊김 없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Open Word Bible은 인용을 21절 끝까지 열어 두고, 그 결정을 불확실로 표시하며, 다른 견해를 각주로 알려 줍니다. 같은 질문이 요한복음 3:31–36에서 다시 나옵니다.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를 보십시오.
왜 의미 결정인가
문장 부호는 문체의 문제, 곧 언어마다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종류의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9:5가 메시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지, 또는 고린도전서의 어떤 말이 바울 자신의 견해인지 그가 바로잡고 있는 견해인지는 저자가 무엇을 뜻했느냐에 관한 질문이며, 모든 언어가 같은 답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결정은 의미의 층에서 한 번 내려지고, 모든 번역이 그것을 따릅니다. 결정이 아슬아슬한 곳에서는 모든 언어의 모든 독자가 같은 불확실 표시와 같은 각주를 봅니다.